사회사목연구

<공생공빈의 길> 3장. 실천 전략 : 생명주권을 찾아서 공생공빈의 길

관리자 0 1,140 2019.08.11 21:16


2011. 8. 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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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실천전략 - 초근대(Trans-Modern)론과 생명주권의 길
Ⅰ. 국가에 대하여
2009년 벽두에 일어난 용산참사는 국가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성찰을 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국가는 우리 국민을 지켜주는 지고지순한 대상인 줄 알았고, 그래서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를 게양하면서 그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곤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그 구성원인 국민을 위협하고 해치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국가라는 테두리 내에서는 적어도 부자든 빈자든 평등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가장 약자들에게는 국가는 그야말로 ‘유일한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기구에 불과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국가라는 기제에 본원적으로 내재된 모순이 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은 그 국가내에 포함시키는 구성원을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선별하고 배제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씨족사회를 하나의 국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국가의 맹아형태로서 아니면 그 전 단계의 형태로서 고찰할 때, 씨족사회의 구성원을 가리는 기준은 명확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혈연이었지요. 이 씨족사회가 좀 더 커져서 부족국가 형태로 커지면 구성원을 분류하는 기준은 좀 더 복잡해집니다. 아마도 혈연은 기본으로 있으면서도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족국가의 범주에 포함시켰을 겁니다. 여러부족이 연합이라는 형태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을 것이고, 이는 다소 유동적이고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혈연이 되었건, 지역적 조건이 되었건 공동체의 구성원을 선별하는 기준이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부족국가시대부터는 좀 더 복잡하게 됩니다. 바로 국가라는 단위 안에 계급적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권력과 금력을 가진 상층계급이 있고, 힘없고 돈없는 소수자그룹이 생겨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이들 중에 일부 약자는 아예 국가라는 당시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으로 붙잡혀온 포로들이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일겁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노예들은 시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우리의 용산 참사 철거민들은 어디에 포함될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부족국가 이후의 근대 국민국가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근대 국민국가는 혈연적 동일성에 기대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에 구성원을 선별하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Nation의 발명이었습니다. Nation은 국민을 뜻하는 것으로 혈연적, 인종적 속성을 함유한 민족주의를 주요한 기둥으로 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으로는 국가의 지역적 경계내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을 하나의 ’국민‘ 또는 ‘시민’ 개념으로 통합하면서 국민 국가(Nation-State) 체제를 완성한 것입니다. 부연하면 국민국가는 nation이라는 혈연적,인종적 민족주의 개념과 국민개념을 주요 근거로 삼아, 국가의 경계와 국민의 경계를 통일적으로 일원화시킨 근대 이후의 국가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으로 허구적인 것이고 가상의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근대 국민국가는 동일한 민족이고 국민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보호받을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는데, 우리의 용산 철거민은 자격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보호는 커녕 로마의 노예도 당하지 않았을 폭력적 학살아래 화염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국가 내의 계급적 차이가, 당연하게 보호받아야 할 국민의 권리를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계급적 탐욕 아래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무참히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적 속성인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여지없이 박탈당해버린 것인데, 이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계급양극화가 극단화하면서 사회통합이라는 공공선이 내팽개쳐지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시장이 국가를 능가해버린 시장지상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순환이 영토적인 틀을 점점 벗어나면서 세계적 자본운동이 국민국가라는 틀과 책임을 벗어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공동체는 어떠한 공동체인가하는 점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근대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행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일겁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단호하게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외치고 국가기구에 협력하지 말고 세금도 내지말고 비폭력적으로 국가에 저항하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국가 자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류사회에서 늘 공동체는 존재해 왔는데, 그것이 씨족사회든 부족국가이든 근대국민국가이든 국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국가를 누가 움직이고 지배방식이 어떠했느냐가 문제라고 봅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라면 인류의 생존시대마다 각 시기에 맞는 공동체의 구성형태가 있었을 것이고, 근대 국민국가는 그 독특한 특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부족국가라는 단위를 뛰어넘어 더 큰 형태의 인간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단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형태일 것입니다.
앞에서도 근대 국민국가는 내셔널리즘을 주요 근거로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은 지구촌의 규모로까지 확대된 지금 시대에 와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인류의 관계망이 형성, 성숙되지 못했던 근대 초기에 특정범위의 사람들이 그들끼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통합적 구심점과 이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념을 지탱하기 위한 근거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나 국민이라는 개념, 그리고 종교,언어,문화적 동일성 등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지구촌이라는 단일한 범위로 생활영역이 커져버린 지금 시대를 생각해보면, 내셔널리즘을 주창하는 것은 마치 부족국가시대 때에 혈연을 내세워 씨족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습니다.

 
유시민은 그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독일인에게 고함”을 쓴 피히테는 독일인이었고, 시민이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한 자유주의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유럽인이었고, 톨스토이는 지구인이었다라고 말한바가 있는데, 지금 우리 시대는 최소한 르낭이나 톨스토이의 비전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피히테의 독일민족주의는 더 이상 충분히 진보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면 지금 이야기해야 할것은 철지난 내셔널리즘과 민족이 아니라, 지구촌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 구성의 원리와 비전일 것입니다.

 
결국 저는 국가를 없애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고, 근대 국민국가에 한해서 이야기하더라도 국가는 합리적 조절자,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려면 국가의 구성원이자 주인인 국민(시민)이 얼마나 깨어있는 힘으로 비판하고 저항하고 견제하느냐가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그것이 현재의 근대국가가 최소한의 평화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입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깊숙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구촌’이 하나의 언설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화한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의 공동체도 미래지향적인 범주 규정이 필요하고 그에 합당한 가치규범을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촌 공동체는 혈연이나 한정된 지역, 또는 특정한 민족으로 구성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근대 국민국가처럼 국가의 경계를 절대시하고 그 구성원인 국민을 배타적으로 획정하는 사회단위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지구촌 공동체의 개념규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혈연도 아니고 지역적 기반도 아니고 민족적 동일성에도 의지하지 않는, 지구인 전체가 ‘지구촌’ 마을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다른 국가의 국민이라고 배타시해서도 안 되고, 혈연이나 인종이 다르다고 불평등을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지구촌 인류는 모두가 평등하게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지구촌 인류를 근대국가의 ‘국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공민(供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지구시민’인 것이지요.
사실 세계는 개방계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개별개체의 고유성이 모든 생명의 기본단위가 된다는 사실이나 공간적 접촉범위의 한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지역 공동체의 자치라는 목표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 공유, 참여를 통한 생명의 발전의 역사를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을공동체의 자치를 처음으로 제기한 인도의 간디가 마을 스와라지를 주장할 때 생각한 마을의 모습조차 옛날의 마을 판차야트를 그대로 되살리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세계의 상호관계 안에서 독립적인 마을단위인 스와라지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통마을들이 사라지고 마을의 형태가 많이 변화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구나 세계의 상호관계 안에서 지구촌 차원에서 어떤 공동체를 구상할 것인지를 모색해야 합니다. 그것의 한 방향으로 공민주권을 통해 민주주의나 개인의 자유 같은 근대사회의 올바른 가치들을 전승시켜내고, 전 지구적 차원의 평화주의나 생명․생태주의를 기본으로 한 생명주권의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것은 간디의 주장에도 부합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전체 지구촌을 구성하는 자격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만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뭇생명들이 평등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동일한 하나라는 통찰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은 우주만물의 삶에 관계하는, 또 참여하는 주체로서 승인받는 것이지요. ‘지구’나 ‘우주’라는 마을에서는 생명의 관계망이라는 기준으로 통치나 운영원리의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공동체의 기준은 천상의 神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경계지어진 근대의 ‘국민’도 아닙니다. 天, 人, 物을 모두 공경하고 생명가진 모든 만물을 공동체의 주인으로 상정하는 ‘생명’이 바람직한 공동체의 핵심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animaphilia(생명애)’의 기준이고, 생명주권의 실현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공간은 꼭 소농공동체일 필요는 없습니다. 소농공동체가 나름대로 긍정성을 가지고 있고, 생명의 기준에 합당하는 측면이 크지만, 소농공동체라고 해서 좋은 가치, 정신, 문화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낡은 관습이나 폭력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지요. 결국 ‘생명’의 가치, 순환성, 관계성, 다양성이라는 생명과 자연의 원리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공간의 크기나 규모, 성격에 관계없이 생명의 공간, 생명의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 공간은 근대가 추구하는 진보나 무한한 성장이라는 신화와는 결별해야 합니다. 성장은 어디까지나 생태순환적 원리에 따르는 정도까지만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적정기술(AT)이나 적정성장의 원칙입니다.
우주만물은 모두가 서로 관계맺고 다양한 자기 생명력을 발휘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막지 않으려면 무제한의 경제성장이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과학기술은 거부해야 합니다. 진보와 발전, 편리함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와 공생할 수 있는 관계망을 보전하고 불편함과 결핍을 받아들이는 각성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근대국가 이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공동체는 ‘생명’의 이름과 기준으로 사고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생명의 공간과 생태(순환)적 자연의 공간도 찾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11-7-15)
Ⅱ. 시민주권, 공민주권, 생명주권에 대하여

이제 앞에서 본 국가에 대한 정의에 근거할 때 우리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생명의 공간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종교나 언어, 문화와 같은 국가를 경계짓는 근대적 조건들이 아닌, 생명이 기준이 되는 지구공동체이어야 한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백낙청 선생이 늘 말씀하시길 우리는 근대완성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안고 있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근대적 국가체제와 가치관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또 의회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통상의 상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근대 민주주의 국가, 근대 공화정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이것조차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술한 기반위에 위태롭게 놓여있다는 것이 작금의 진실입니다. 국가권력과 자본은 언제라도 다시 시장독재로 되돌아갈 기회를 엿보며 사악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다시 말하면 시민의 권리와 국민의 인권이 언제라도 전근대적 퇴행 속으로 내팽겨쳐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민주권은 21세기의 벽두에도 여전히 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시민세력은 견고하지 못하고, 우리의 근대는 아직도 미완성입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근대가 미완성인 사례는 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근대국가의 핵심원리라 할 국민국가를 아직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식민시대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세계 곳곳으로 쫓겨나고 헤어지는 이산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은 해방된 조국의 ‘국민’에게 주어지는 권리와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직도 우리는 근대국민국가의 기본적 조건이라 할 민족국가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직 근대완성의 과제조차 제대로 이룩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국민국가 구성원이 누려야 할 시민주권도 미약하기만 합니다.
근대국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민족주의에 입각한 단일 국민국가간의 경쟁과 배제를 기본 국제질서로 승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생산력 중심주의를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승인하고, 진보와 발전을 의심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회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근대 국가체제는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그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도 하지만, 실상은 사회주의도 생산력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근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근대라는 역사발전단계 안에서 계급모순의 심화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과도하게 개인의 자발성과 창발성을 억압하고 위축시켰기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실패한 실험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지구촌 사람들은 한번도 근대라는 Aporia를 근원에서부터 해결하고자 시도해 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근대극복의 과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민주주의의 문제도 고찰해 볼 점이 많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운동의 목표가 오로지 ‘민주화’였듯이 민주화만 되면 모든게 잘 될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 일컬어지는 구미의 경우에도 여전히 경제적 양극화와 전근대적 폭력이 교묘하게 관철되고, 자본의 탐욕은 경제위기를 재촉하고, 생태위기, 에너지위기는 끝간데를 모를 지경입니다.
흔히 민주주의, 민주화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말하지만, 민주주의로는 새로운 지구촌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내지 못합니다. 당연히 근대극복의 과제에서 민주주의의 해법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미약합니다. 나는 민주주의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민주주의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근대사회 속에도 여전히 배제되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고, 생태적 전망이 발붙이기 어려운 구조를 목도하게 되고, 시민의 주권이 완벽하게 행사되는 것을 방해하는 국가와 정부의 폭력, 자본의 폭력을 보게 됩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원활하게 작동하고 근대완성의 과제가 해결된 서구사회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서구가 최고의 지향점으로 삼는 ‘근대’라는 사회체제가 무언가 불완전한 철학과 토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근대가 추앙하는 똘레랑스(求同尊異)라는 가치가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인데 이는 권력,금력을 가지고 지시하는 자가 지배받는 자에게 시혜적으로 무엇을 베푼다는 말입니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국가를 이렇게 대하고, 서구인은 동양사회를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강제력을 기본으로 하는 지배, 복종의 관계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시선 아래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대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와는 공존,병립할 수 없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될 뿐입니다. 이것이 근대 민주주의와 근대 국민국가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른바 근대성이라는 것을 극복한 새로운 전망을 일단 ‘초근대’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생명’이라는 기준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앞장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민족주의(내셔날리즘)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인 문화적 민족주의조차도 결국은 인종과 민족, 국민이라는 가상의 조건을 내세워 인간을 구별하고 분리하고 배제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가 가져온 결과는 생태파괴와 인류절멸의 위기입니다. 근대국가의 조건을 형성시켜온 민족,언어,종교,국민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평화로 인도하는 ‘생명’의 조건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지구촌을 구성하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이제 생명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초근대의 방식이 모색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animaphilia)이며, 생태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며, 순환성과 관계성, 다양성의 생명원리가 관철되는 자유와 공생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공민(供民)의 공간이라 이름짓습니다.
자유로운 개체들간의 자유로운 연대를 통해 만들어가는 공간은 개체(人와) 공동체(共)가 통일된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개체성과 고유성이 충분히 존중되는 공간이며, 동시에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으로서의 공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홀로 또 함께의 정신이 오롯이 반영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 주체의 이름은 공민(供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지구시민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숲과 공간은 이러한 공민(供民)의 공간(空間=共間)이 주체로 나서서 만들어 냅니다.
근대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시민주권’은 지구촌시대에 조응하여 ‘세계시민주권’으로 확장되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글로벌 차원에서 생명가치에 기반한 시민의식의 성장이 전혀 새로운 초근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공민주권(供民主權)’이라 이름붙여도 될 듯 합니다. 공민주권은 지구차원으로 확장된 시민주권입니다. 물론 시민주권이 근대 체제를 완성하고자 하는데 비해서 공민주권은 근대체제를 넘어서는 초근대 지구촌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실제로 공민주권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상태가 도래하면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는 스스로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민주권’이 현실적인 힘을 가지게 되면, 국가는 소멸하고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생명의 공간’이 창출되어, 자유로운 개인, 자치․자급하는 지역, 供民이 공존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공생공빈(共生共貧)의 가치에 기반하여 만들게 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물어야 할 것은 근대완성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통합․조정해서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우리사회의 단계가 두가지 과제가 다 필요하다면 그것을 순차적으로 할 것인지, 동시에 할 것인지, 그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검토해야 합니다.
구조적으로 본다면 근대완성의 과제는 시민주권을 어떻게 발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고, 근대극복의 과제는 供民주권(지구시민주권)과 생명주권을 어떻게 발현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계열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민주권을 제대로 발현시켜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선순위에 놓일 수는 있으나, 공민주권 나아가서 생명주권이라는 방향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절차적 민주주의에 목메달고 마는 현실을 초래하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민주권-공민주권-생명주권의 문제는 하나가 완성되면 그 다음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단계적 순서의 관점이 아니라 통시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휴머니즘과 내셔날리즘, 자본주의라는 치유하기 어려운 근대의 난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상처에만 섣불리 메스를 들이댔다가는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듯이 또 하나의 새로운 근대극복의 전망이 무위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동시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의 운동이 궁극적으로 근대완성이라는 과제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반도 통일의 문제도 단순히 근대 국민국가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의 통일이 아니라 생명의 관점, 공민주권과 생명주권이 넘쳐나는 토대에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결론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과정속에서 라야만 올바른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도 담보될 것이며,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제국주의와 핵의 위험성, 나아가서 생명말살, 생태위기까지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주권-공민주권-생명주권이 완벽하게 관철되는 그 방식과 길에서 생명의 공간, 생명의 숲이 만들어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생명이라는 기준을 구성하는 본질적 내용이 무엇인지 animaphilia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20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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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1) 공민, 공민주권이라는 말을 쓰면서 共이 아닌 供을 쓴 것은 供이라는 글자가 人+共으로 이루어진 글자라는데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공동체는 결국 자유로운 개인(人)의 자유로운 연대(共)를 통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 구성원을 근대의 국민이나 시민이 아닌 공민이라고 이름붙이면서 共民보다는 供民이라고 하는 것이 지향사회의 가치를 더 정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시민주권, 공민주권, 생명주권의 개념 정리

 
구분

시민주권

供民주권

생명주권
과제 유형

근대의 과제

초근대(超近代)의 과제
주권의 주체

일국의 시민

지구촌 시민(인류)

뭇생명
주요 목표

민주주의

독립 국가

지구촌 공생, 평화

생태순환적 지역사회의 자립

Animaphilia,

생명의 공간,

자연의 공간

 

<그림>

Ⅲ. 전지구적 연대와 지역자립

한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초근대가 지향하는 지구촌 공민주권을 지향하는 것과 생태순환적 지역사회의 자립을 추구하는 두가지 문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공민주권은 지구촌이라는 글로벌 차원에서 인류가 어떻게 관계망을 맺고 존재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 인류의 연대와 공생을 지향하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지역의 자립이라는 것은 지역적 차원에서 생태적 삶, 자연의 순환이 살아있는 삶, 자치와 자급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철저히 지역적 차원에서 사고하는 개념입니다.

 
앞에서 공민주권의 供을 설명할 때, 供은 개별체의 고유성과 자유라는 측면과 함께, 함께 하는 사람들 간의 공생과 연대를 동시에 아우르는 개념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지구촌의 공민주권을 지향할 때도 이미 그 속에는 각각의 개별체의 자율성이 바탕이 됨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글로벌 차원의 연대를 지향한다고 해서 지역의 개별성이 무시될 이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지구촌 차원의 네트워크와 공동행동이 중요한 것과 함께 지역의 개별적 조건과 특성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 보전시켜 내는 것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88년에 출소하기 전 감옥에 같이 있던 老선배들께 "이제 밖에 나가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선배들께서 말씀하시길 "생각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답을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답을 원용하려 합니다. "생각은 세계적 차원에서 하고, 실천은 지역적 차원에서 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이미 세계는 어느 한 지역만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습니다. 하루면 지구 한바퀴를 돌 수 있고, 한 지역의 분쟁이 전 세계적 문제로 부각되어 버리고 국제문제화 됩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더더욱 그러해서 국경이라는 것이 그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히 ‘지구촌’이라는 말이 상징어의 수준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지구적 수준에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싫어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현실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집단이 자본가들입니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닙니다. 자본은 이미 십년, 이십년전에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생산과 자본의 세계화를 추진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그런 동력을 이론화하고 이데올로기화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의 문제에 대해 대항해야 할 민중진영은 어떠합니까? 아직도 생각은 지역적 범위, 혹은 현장사업장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반면에 지역적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진행되어야할 실천황동은 지역 특수성과 제대로 결합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기 일쑤입니다.
민중진영도 전 세계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실천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의 현실을 철저히 연구하고 지역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생각은 지구촌시대에 걸맞게 지구적 수준에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생각을 지역적으로 하고 말면 우물안 개구리밖에 안 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오류가 ‘민족주의’적 경향입니다.

 
민족주의란 19,20세기의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를 단위로 하여 팽창과 지배흡수를 추구하던 서구의 침략논리로 출발한 것입니다. 물론 당하는 쪽, 즉 제3세계나 식민지에서 Nationismus 차원의 방어적 민족주의가 민족자결과 민족해방의 명분아래 전 세계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지구촌 시대입니다. 개별 국가나 민족의 문제로는 분쟁과 전쟁이 더 심화될 뿐 더 이상 민족주의가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여전히 해방의 깃발로 Nationismus 차원의 민족주의가 현실적 유용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쟁과 배제의 서구적인 Nationalismus 차원의 반동적 이념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워온 대한민국이 이제 좀 살게 되자 베트남 민중의 해방을 총으로 막고, 버마 독재권력의 돈줄이 되고, 공공연히 침략을 말하게 된 것이 이런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요. 최근 해외에 식량기지를 확보하겠다는 정부의 언설도 이런 침략적 민족주의의 이념아래 벌어지는 제국주의적 참담함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합니다.
민족주의가 이 시대에도 진정 긍정성을 지속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와의 단절을 의미하고, 생태위기와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의 질곡을 해결할 수 있는 의미에서의 새로운 무엇이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 답은 지역에서도 찾아져야 합니다. 지구촌의 인민이 생활을 맞닥뜨리고 사는 구체적 각 지역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찾아지고 정착되어야 합니다. 생명과 자연의 삶의 방식 말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생각도 전지구적(Global) 차원에서 하고, 실천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하는 바람에 생긴 것입니다. 자본은 속성상 무한히 팽창하고 축적해야 하는 것이기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략을 구상하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경영을 추구합니다.

 
이른바 ‘세계화’의 전도사를 자처하던 김영삼 정권 때 온 나라가 세계화의 열풍에 휩싸였고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민중들을 생존경쟁과 1등 지상주의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생각도 글로벌하게, 실천도 글로벌하게 해야 했던 자본가들이야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하지만 그 정신없는 세계화 광풍이 불어닥친 후 민중들은 IMF라는 세계화의 검은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김우중은 지금도 가장 많은 벌금을 국가에 납부하지 않은 자로 남아있는데, ‘세계화론자’들은 늘 이런 식으로 민중들을 현혹하여 왔던 것입니다.
실천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 자본의 생리에는 맞을지 몰라도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입장에서는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국제구호 같이 훌륭한 일조차도 철저하게 현지인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실제적이고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면 헛일이 됩니다. 어설픈 국제구호는 오히려 지역민이 지역의 현실에 맞는 해결책을 자기 힘으로 스스로 찾아내는 주체적 힘을 약화시킬수도 있습니다.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은 근본적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심도깊게 이해하는 한편으로 지역의 힘에 기반한 자치적 방식으로 자급,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되고 추진되어야 합니다.
김영삼과 김우중이 세계화 담론으로 신자유주의를 위한 길을 닦아놓았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마침 몰아닥친 자본의 지역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적극 도입했고, 이때 글로벌하게 성장한 재벌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우위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실천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것은 획일화된 기준으로 폭력적인 강제력을 지역에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역의 모든 여건과 상황이 다른데 전 지구적으로 동일한 기준과 잣대로 밀어붙인다는 발상은 자본확장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추진하는 자본측의 논리이지 민중의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 지구적 자본축적의 대박만 생각하는 자본에게 지역의 인민은 안중에 없습니다. 자본은 지역인민의 입장에 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역은 무시하고 밟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의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인민의 입장은 다릅니다. 실천은 지역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대응책을 찾아야 합니다. 지역적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담론은 관념일 뿐입니다. 자본이 전 세계적으로 전략을 짠다면, 민중진영도 전 세계적으로 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갖추어야 합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민중연대를 통해서 생각을 모으고, 그 다음엔 흩어져서 각 지역에서 실천행동을 조직해야 합니다. 인민의 지구적 연대와 지역적 실천의 결합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접화군생의 생명원리, 그 중에서도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지역적 자립에서 중요한 개념적 위치를 점합니다.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전체를 풍요롭게 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사회에서는 각 지역공동체가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스스로에 맞는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을 통해 다양성이 고양됩니다.
이런 다양성의 입장에서 볼 때 지역공동체가 고유의 문화와 언어, 종교적 특성을 보전하여 집단적 결속력을 높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자치와 자급을 통한 자립을 달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유와 자율을 통한 지역의 창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 지구적 네트워크라는 것도 실현불가능한 일입니다. 연대와 공생은 개체와 고유성,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이라는 공간은 가능하면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와 규모라야 할 겁니다. 근대의 익명성과 비대면성이 끼여들면 생명의 공간, 자연의 공간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11-8-10)

 

Ⅳ. 생명주권의 실질적 내용- 생명애(animaphilia)
시민주권과 공민주권, 생명주권을 향한 길에서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기본 나침반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이미 말한바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사상,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을 통해 우주에 존재하는 뭇생명과 만물을 공경해야 한다는 동학의 삼경사상 등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animaphilia’라고 이름지은 ‘생명애’의 개념도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 특별히 생명주권의 내용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주로 설명하는 틀이 될 것입니다.
animaphilia(생명애)는 초근대(Trans-Modern)를 지향하는 우리운동의 본질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개념입니다. ‘전근대’가 시민주권도 확립하지 못한 근대이전의 사회체제를 말하고, ‘비근대’가 근대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저항해서 근대이전의 호혜와 자립의 소농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개념인데 비해서, 여기서 내가 말하는 ‘초근대’는 지구촌시대라는 개방과 공유, 참여의 시대에 그 조건에 상응하는 공동체의 구조를 새롭게 찾아내고, 자유로운 개체들간의 자유로운 연대를 통해 생명의 공간을 만들어내자는 ‘供民주권’과 ‘생명주권’이 실현된 사회를 말합니다.

 
이제껏 인류의 역사, 지구의 역사에서 시민의 주권,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무수히 논의되었지만, 생명 자체를 지구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권리를 주창하는 논의는 대두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는 ‘생명주권’ 개념이 태동할 인류사적 시기가 도래하였으며, 그 생명주권은 전지구적 차원, 전 우주적 차원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구조적 틀을 찾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구적 차원의 공민(지구시민)은 생명주권이 뿌리내릴수 있는 기본 틀이자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供民주권과 생명주권은 형식과 내용의 상응관계일수도 있고, 동일한 가치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animaphilia는 공민주권과 생명주권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animaphilia의 가치는 초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 열쇠인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animaphilia는 근대의 Nationalism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셔날리즘이 협애한 민족공동체를 그 근거로 하고 있다면, animaphilia는 근대 국민국가의 좁은 틀을 벗어던지고, 지구촌 시대에 조응하는 지상의 모든 만물과 뭇생명이 주인으로 나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국가라는 것이 천상의 神에 기댔고, 국민국가가 지상의 국민을 기반으로 했다면, 새로이 나타날 글로벌 초근대 사회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뭇생명을 그 기반으로 합니다. 그 사회는 기존의 특정지역 중심의 문화나 민족 등에 의존하지 않고, animaphilia의 가치에 기반해서 생명주권이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animaphilia는 민족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므로 내셔날리즘과 관계가 없고, 국민으로 이루어진 일국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근대의 지역공동체로 회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animaphilia를 본질로 하는 사회는 자유와 연대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지는 供의 공간이 토대가 되어 자유로운 개체들간의 자유로운 연대․호혜․자급․자치방식이 접화군생의 생명원리를 기준으로 논의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여럿이 걸어가는 가운데 숲속에서 생명의 공간, 자연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그런 공간,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animaphilia를 중심으로 하는 초근대사회는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의 원리에 따라 지역의 문화와 정신, 언어 등을 소중하게 보전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원리, 생명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획일화와 분절화의 과정을 통해 순환의 맥이 사라지고 제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animaphilia의 입장에서 서서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소농공동체와 농업을 어떻게 초근대 사회에 맞게 보전하고, 핵심가치를 전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것입니다.

 
초근대 생명주권이 실현되는 새로운 세계, 그것을 供과 생명과 자연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숲이라고 할 때,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세계의 모습은 진보와 성장, 도시화와 상품화, 노예노동으로부터 탈주하여 호혜와 느림, 생태적 삶, 자유로운 연대와 자급의 삶을 새롭게 열어나가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초근대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공생공빈(共生共貧)’의 가치가 꽃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20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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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1) animaphilia라는 말은 생명을 뜻하는 anima와 사랑(愛)을 뜻하는 philia를 합성한 조어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말이지요. 원래 ‘생명애’라는 말로 ‘biophilia’라는 말이 있고, 책제목으로도 나와 있습니다만, 왠지 biophilia라는 말에서는 생명을 하나의 수단으로 상정하는 폭력성이 느껴집니다. 생명이라는 언설속에 여전히 인간중심주의가 내재해 있는 그런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하는 초근대 사회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또 anima라는 말은 모든 뭇생명들 속에 신성성이 내재해 있다는 animism과도 같은 맥락의 말인데, 이 또한 생명을 핵심기준으로 하는 우리의 지향점과 상응하는 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럿이 걸어가면 숲 사이로 길이 납니다. animaphilia와 접화군생의 생명원리로 생명의 숲에 길을 내 봅시다.

 

[출처] <공생공빈의 길> 3장. 실천 전략 : 생명주권을 찾아서|작성자 메주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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