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목연구

<공생공빈의 길> 2장. 지향가치: 공생공빈 공생공빈의 길

관리자 0 1,380 2019.08.11 21:10


2011. 8. 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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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지향 가치 - 공생공빈의 길
Ⅰ. 공생공빈(共生共貧)의 길
2008년 6월은 그렇게 밝았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함성은 5월 마지막 날의 도심을 촛불로 수놓았고, 경찰은 물대포와 군홧발로 이를 막고자 했다. 취임한지 채 100일이 안된 신정부가 얼마나 잘못을 했길래 시민들이 그렇게 들고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주부로 하여금 유모차를 끌고 나오게 만들었고, 무엇이 10대 중고등학생들, 그리고 초등학생에서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연령대, 전 계층의 사람들의 손에 촛불을 들게 만들었을까?

단순히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를 먹고 싶어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무의식적 자각이 깔려 있었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공동체의 무언의 갈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간의 근대담론이 주도한 경제발전 지상주의로 인해 개개인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공동체가 갈갈이 찢겨나가는 참혹함을 마주하게 된 시민들이 잃어버린 가치, 인간과 생명에 대한 가치를 찾아나가는 지난한 행진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었다.

그래서 촛불은 ‘권위주의’나 ‘계몽’이 아닌 ‘다양성’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내재하고 있었고, ‘순환’하는 가운데 여유가 있는 시간에 대한 추구까지를 포함한 좀 더 발전적인 문제제기까지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촛불과정에서 애국심이 아니라 ‘주권’이 더 중요했고, 국익보다는 ‘생명’을 선택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거기에 더해 이제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 대한민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근대 이래 국가권력과 외세의 힘 아래에서 줄곧 왜소한 모습으로 숨죽여 있던 개인들이 진정으로 국가에 대해 개인의 존재를 표현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근대적 시민’의 진정한 모습을 나는 촛불집회에서 보게 된 것이다.
서구 근대시민사회의 근본적 토대인 근대적 ‘시민’이 이제야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떳떳이 등장함에 따라 더 이상 전근대적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과 우리사회의 성숙성을 읽지 못하고 다시 시대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민간독재정권의 강압적 폭력성이 일시적으로 성공할런지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근대성의 가치를 체현한 새로운 시민의 등장을 체험한 이상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시민의 등장은 근대성의 종결이라는 하나의 단계를 지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이제 단순히 ‘근대성’의 추구가 아니라 그 근대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도전해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 또한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근대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와는 또 다른 새로운 가치에 대한 비전을 촛불집회 내에서 어렴풋이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이 그러하고 생태적 가치에 대한 눈뜸이 그러한 것이다. 동시에 시민들이 함께 놀고 공부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가면서 온라인 네트워크와 오프라인을 결합시키는 양상은 근대 이후의 가치가 현실에서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가 하는 사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촛불현장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엿보였고,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의 집단적 지성이 나타났다. 그러한 집단지성은 기존의 모든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의 주장을 표출했고, 자치와 자율성에 기반해서 국가라는 거대권력에 대해 시민의 해방적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네트워크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촛불운동은 그야말로 전 세계사적으로, 또 문명사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사회운동의 형식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하나의 세기를 긋는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우리 사회는 그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공고화, 그를 통한 성장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생산력에서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양극화와 불평등의 구조적 고착화가 사회의 통합을 심히 저해하고 발전을 막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성장지상주의와 시장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 발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성장지상주의라는 것은 이미 ‘고용없는 성장’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70년대나 80년대까지는 일부 통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화시키고 소수 지배권력 집단에게만 성장의 과실이 돌아가는 잘못된 전략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시장자유주의 또한 1% 재벌들에게만 ‘자유시장’의 잇점을 최대한 누리게 해 주는, 자본의 폭력성을 은폐해주고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배려되어야 할 사회적 정책조차도 배제해버리는 적자생존의 논리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동시에 세계화 시대에 더 이상 민족적 이익도 지켜내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의 포섭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지배권력의 지배담론에 맞서 저항운동세력이 채택하고 있는 반대논리는 이제껏 적절했는지를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한국사회에서 기존의 저항담론은 주로 민족주의와 계급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을 수호하려는 전략을 채택해왔다. 하지만 현재 민족주의는 저항적 민족주의로서의 의미를 제외한다면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계급주의는 현실 사회에서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의 자본주의전략 채택을 통해서 그 실천적 함의가 많이 상실된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적 가치는 여전히 자유와 평등의 토대 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나, 그것이 자연과의 관계속에서 통합적으로 인간을 바라보지 못하는 약점이 점차 노출됨으로써 그 의의에 대한 의구심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들만의 자유’나 ‘탐욕의 평등’으로서의 민주주의의 가치는 어쩌면 서구 근대적 프레임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으며, 현실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의 쇠퇴 같은 것이 이런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점이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운동적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무언가 더 해야될 것, 더 생각해야 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측면에서는 생각해봐야 할 점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할 새로운 가치들의 어렴풋한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그것은 손대중과 계량컵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공생(共生)의 원리에서 찾을 수도 있고, 불편함이나 어떤 결핍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공빈(共貧)의 논리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고 감히 제안하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제국주의 지배와 전쟁의 역사적 경험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국가의 논리에 대해서 무조건적 복종의 자세를 내면화해 왔으나, 이제 근대 시민의 등장과 그 극복을 모색하는 시점에서는 국가보다는 작은 단위, 즉 (대)가족이나 길드, 지역공동체, 교회 등과 같은 중간규모의 공동체를 통해서 보다 바람직한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확산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현실에서도 이미 협동조합이나 두레, 품앗이, 지역통화 같은 다양한 공동체모둠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몸짓을 통해서 공생공빈의 정신이 실제 민중의 생활에서 생명의 삶, 자연의 삶으로 제대로 살아나기를 바라며 그런 삶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글이 하나의 생각거리와 지평점을 제공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 * * * * *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지 않고 생을 영위해 나가려고 한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천명이자 의무요 권리이다. 자기가 생긴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의 삶을 이 지상에서 나누다가 때가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천리(天理)다.
그런데 그 많은 생물들 중에서 그 천리를 거부하고 주어진 것보다 더 오래,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유일한 족속이 바로 인간이다. 자기만 잘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때로는 다른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이렇게 되어서는 땅과 생명의 터전이 순리대로 평화롭게 온전할 수가 없다.

생명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하나의 개체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 및 주변생물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돕고 나누며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을 거스르려고 하면 반생명의 역리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공생(共生)이 중요한 것이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서 함께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의 원리, 공생의 원리이다.
기독교 신학자 안병무는 ‘생명’은 곧 ‘관계맺음’이라고 했다.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모든 조건이 맞아야 생존이 가능하게 된다. 서양의 사상에서는 개별 개체가 별도로 제 혼자 존재하는 것이라는 존재론적 가치관이 지배적이었지만, 사실 그 어떤 개체도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우선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대지(大地)가 있어야 하고 바람(공기)이 숨구멍을 틔어주어야 한다. 동시에 햇빛이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고, 생명에 필수적인 물이 순환되어야 함도 당연하다. 또 이런 모든 조건들은 모두가 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존재하고 있으니 하나의 움직임은 또 다른 하나의 움직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제임스 러브록이 말하는 가이아 이론에 의하면 지구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전체적인 지구환경을 조화롭게 유지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불교에서도 세상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생명사상에 입각한 사유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이 몸뚱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정자와 난자가 어렵게 만나 태 속에서 어머니가 먹는 음식의 기운으로 살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식이란 곧 흙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이 살을 만드는 것이다. 또 어머니가 먹는 물로 눈물, 콧물 등 몸 속의 수분을 만들기 시작한다. 흙 기운과 물 기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형상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섭취한 칼로리로 따뜻한 체온을 만드는데, 이 칼로리가 바로 태양열 에너지이다. 그리고 태 속에서 어머니의 호흡과 함께 하다가 탯줄이 끊기면 바로 코로 호흡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흙 기운인 지(地), 물 기운인 수(水), 태양열 에너지인 불기운[火], 공기 기운인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우주 자연에서 빌려다가 태 속에서 열 달 동안 몸을 만들어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그 기운들을 빌려온 곳으로 다시 돌려 주게 된다. 몸뚱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눈물과 콧물 등은 물로 돌아가고, 에너지는 불기운으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호흡의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결국은 죽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드라망의 생명원리이자 순환성, 관계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물이 제 홀로 자라고 존재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生(생명사상)은 곧 共(관계론)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흔히 공생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관계성과 다양성, 순환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共生)의 생명원리는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연히 모두의 욕망을 모두 충족할 수는 없게 만든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곳이라는 간디의 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공생은 공빈(共貧)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함께 가난하지 않으면 공생할 수가 없다. 결국 인간살이에서도 소수가 풍족하고 편리한 것을 독점하게 되고 그것이 일상화되어 가면 결국은 다수가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1:9의 세계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삶이란 함께 산다는 것이며 동시에 모두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소박한 삶을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共은 곧 貧인 것이다. 관계를 맺고 함께 한다는 것은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가난은 자발적인 가난(Voluntary Poverty)을 강요하는 것일 수는 없고,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 궁핍(Modernized Poverty)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것을 나누고 도와주는 관계 속에서 해학과 골계, 흥과 즐거움, 때론 축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가난(Convivial Poverty)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평균적인 가족농의 삶의 모습이 이러한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일과 놀이와 학습이 하나의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나 가난 속에서도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한편 ‘공빈’이 ‘공생’의 조건이라고만 이야기하면 ‘공빈’ 자체적인 의미는 무엇이냐고 물을 법도 한데, 단순히 ‘공빈’이 ‘공생’의 보조적인 의미만 가지는 개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공생과 공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같은 내용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오히려 공빈이 공생을 받쳐주는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공빈이라는 것은 바로 ‘불편함’과 ‘결핍’을 수용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생이 없는 공빈이 무의미한 것과 아울러, 불편함과 결핍이라는 공빈이 없는 공생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편한 상태에서는 이웃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현대사회는 오로지 안락과 편리함만을 쫓아 그것이 진보이고 발전인양 뛰어 왔지만, 사실은 그런 과정에서 불편함이 가져다주는 인간간의 관계와 배려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버리고 없어져 버렸다. 불편함과 결핍이 오히려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해 주고 인간사회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불편함을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불편함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불편함을 즐기고 “난 이쪽이 더 기분이 좋아!”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생태적 위기와 환경문제의 기본 해법은 바로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더 인간과 지구생태계에 도움이 된다는 즐거운 상상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결국 불편함과 결핍이 존재해야, 배려와 보살핌의 공생이 가능하고 더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공빈’이 단순히 ‘공생’의 조건이라고만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공빈’은 ‘공생’의 조건이자 ‘공생’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생명(生)이란 우주 만물과 관계를 맺는 것(共)이며, 관계를 맺고 함께 한다는 것은 곧 빈(貧)을 말하는 것이다. 생(生)은 공(共)이며, 공(共)은 빈(貧)이다. 그리고 공생은 공빈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공빈을 즐기는 것이다. ‘공생공빈’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나는 일본의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의 쓰찌다 다까시 선생의 글을 통해 이 ‘공생공빈(共生共貧)’의 원리의 정수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이 쓰신 “공생공빈-21세기를 사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일본의 이런 속담이 나온다.
“좋은 메주를 만들려면 부부 금슬이 좋아야 한다”
무슨 말일까? 갑자기 생명, 공생의 원리와 메주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그래서 책 251쪽을 잠깐 인용해보자.

“부부 사이가 좋은 것과 누룩이 잘 뜨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직접 만들어 보고야 알게 되었습니다. 바쁜 가운데 시간표를 만들어 30분, 한 시간 후에는 이런 상태가 된다고 작업순서를 예정하고 레시피대로 하면 좋은 누룩이 안 됩니다. 반면에 누룩의 상태를 보면서 “아, 슬슬 온도가 올라왔구나, 식혀줘야지, 온도가 너무 내려가는데 좀 보온을 해줘야겠다.” 이렇게 살피면서 봐 주면 좋은 누룩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부사이가 좋다고 하는 것은 남편은 아내의 상태를 살펴서 응해주고, 아내도 남편의 소원과 기대에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인가에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부부는 사이가 좋습니다. 생명과의 관계도 이래야 되고 유기농업도 그 선상에 있습니다. … (중략)… 이것은 인간관계나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와 연관이 있으며, 단지 좋은 누룩 만드는 이야기가 아닌 공생의 세계의 원리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 부분을 대단치 않게 그냥 넘겼는데 다시 보니 이토록 중요한 이야기가 더 있을 수 없었다. 생명사상이 곧 관계론이라고 할 때, 선생의 메주이야기는 공생의 원리를 가장 핵심적으로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니 공생이라는 것은 상대-그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포함된다-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늘 옆에서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귀찮더라도 한번 더 마음을 쓰고 살펴주고 아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사상과 공생의 실천원리라는 것이다. 나는 순간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눈에 확 뜨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전통속담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집안이 화목해야 장맛이 좋다”라는 말인데, 주부가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동일하다. 생협운동을 하는 ‘한살림’에서 이야기하는 모심(侍)과 살림(生)의 이야기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흔히 생활을 편리하고 쉽게 해 주는 기계문명을 찬양한다. 그것을 누리고 싶어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은 배려와 관심이라는 인간적 호혜와 나눔의 전통을 낡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오히려 그런 거추장스러운 관계들을 말끔하게 없애는 것을 오히려 더 나은 것으로, 더 발전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온갖 제도와 규율을 만들어 관계맺음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진보라는 개념으로 이상화해 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근대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물질과 제도들이 얼마나 인간의 직접적인 대면관계를 간접적인 것으로 형식화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인간적인 관계를 황폐화시키고 인간적인 감수성을 메마르게 하여 왔는지를 되돌아보라. 종국에는 인간적인 감수성을 모두 잃어버린 인류가 자연에 대한 감수성도 잃어버리고 자기를 낳은 대지와 하늘과 자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가 자연에 대한 무지막지한 침탈과 생태위기로 초래될 여섯 번째 대 종말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런데 메주이야기는 그런 진보와 오만의 물질적 기계문명을 거부하고, 생명 가진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네 이웃을 배려하고 모시는(侍) 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공생의 삶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야기 아닌가!

덧붙이자면, 다까시 선생의 공생사상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인간끼리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배려와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필요한 것이다.

동학에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이 있다. 바로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다는 것이다. 한울님은 누구인가? 모든 우주만물에 깃들여있는 우주의 원리이자, 생명의 하늘님이 바로 한울님이다. 한울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가진 모든 것들, 그리고 무생물에게 까지 다 깃들여 있는 것이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한울님이 자신을 보시하여 다른 생명을 길러내는 일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생명이 서로 관계를 맺고 공생하는 대 우주원리를 명확하게 일러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모두 우주적 관계망 아래서 서로 보살피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깨우쳐 주신 것이다.

사족을 달면,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책으로 출간한 것은 1859년이었다. 진화론은 기존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론”과 “神의 절대성”을 깨뜨릴 수 있는 과학적 통찰을 서구세계에 선사했지만, 동시에 그 과학적 진실은 인간지성의 무한한 확대를 통해 식민지 지배를 굳혀나가던 당시 서구사회의 침략적 본성을 옹호하기 위한 이론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해월 선생은 진화론이 나온 1년 후인 1860년에 천명을 받고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동서양의 자연관에서 우리는 적자생존이라는 한정된 인식을 하게 된 서양과 ‘이천식천’이라는 우주적 진리를 깨우친 동양사상의 차이를 보게 된다. (진화론이 단선적 역사발전론이라는 또 하나의 잘못된 진보사관을 서구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일생에 걸쳐 주장한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이 핵심 내용이다.)

쓰찌다 다까시 선생이 메주를 통해서 이 진리를 쉽게 말씀하셨지만, 결국 동학의 해월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고, 또 나중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이야기하신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다. 일본의 반핵 시민과학자인 다카키 진자부로 선생이 이 공생의 사상을 3가지로 나누어 인간과 인간과의 공생, 인간과 자연과의 공생, 미래 세대와의 공생으로 설명하신 것도 또한 동일한 내용인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관계론과 和의 원리, 연대의 가치도 결국 이 생명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뒤에서 좀 더 알아 볼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모두 이렇게 서로서로 관계하고 계시다.

서양의 근대 물질문명은 생명의 관계성을 바로 보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를 이분하고 합리론과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해 획일적인 효율성을 신봉하고 눈앞의 손익계산에만 연연해 생산력주의에 매몰되고 만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획일적, 기계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메주이야기는 가르쳐준다.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레시피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 같지만, 거기에는 더 이상 생명의 숨결이나 인간의 체취가 스며들 여지가 없음을 보여 준다. 풍요로운 관계망을 통한 생명의 확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든 물질문명 아래서는 생명이 발붙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현대의 공해, 환경생태적 문제도 모두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 가장 쉬운 예를 우리는 한국인 고유의 ‘손대중’ 문화와 서양의 ‘계량컵’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간장, 된장이나 김치 등 음식을 만들 때 특별한 레시피라는 것이 없었다. 그냥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소금 한 주먹”, “간장 조금”하는 식으로 어림잡아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다들 배워왔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만들면서도 재료와 양념을 조금씩 넣으면서 때때로 간을 보고, 옆 사람에게 맛을 봐달라고도 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먹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음식물 전체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요리가 진행되는 것이다. 정확히 얼마 하는 양이 없으니 내내 신경을 쓰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체적인 음식맛의 균형과 조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배려와 관심과 관계론의 문화다.

반면 서양의 문화는 딱 정확히 계량된 양만 정해진 시간에 투입하면 결과물이 산출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생산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시간도 적게 들고 서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으니 덜 피곤하게 된다. 사람들끼리 서로 배려하고 계속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으니 편하고 좋다. 그 결과물(음식)은 거의 획일적이다. 100개를 만들어도 맛은 동일하다. 그게 서양의 인위와 물질의 문화다. 그리고 동서양의 이런 문화의 차이는 생활속에 무수히 예가 많다.

언뜻 생각하면 서양 것이 더 좋다. 적은 시간에 훨씬 편하게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으니 누가 싫다 하랴. 근대 세계 역사는 이런 서양문명의 승리의 역사였다. 동양의 비정형적이고 불명확한, 그리고 늘 조정을 해야 하는 불편한 삶의 방식은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생명은 그렇게 획일적으로 자로 재는 문화에서는 풍요로워 질 수가 없고, 관계맺음을 줄여나가는 문화에서는 썩어 갈 수밖에 없다. 현대 생명의 위기, 인간관계의 위기에는 그런 철학적인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가 눈대중, 손대중의 사이와 관계의 문화라고 한다면, 서양의 레시피 문화는 획일적이고 산술적인 덧셈과 계량이 지배하는 個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발효, 숙성의 슬로우 문화라면 서양은 양조간장 같은 스피드와 효율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통찰을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읽으면서 또 한번 발견할 수 있었다. “강의”는 그야말로 관계론에 천착해서 2500년 동양사상을 훑어내린 책인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이 나온다.
바로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신영복 선생의 이른바 ‘연대체’,’어깨동무체’는 소주 브랜드에 쓰일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지만, 그 서체에 담긴 의미는 관계론에 의거한 선생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다까시 선생의 메주이야기와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생은 붓글씨를 쓸 때 한 획 한 획을 쓸 때마다 글자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생각하면서 앞에서 써내려간 획과 다음 획의 관계를 늘 생각하면서 쓴다고 한다. 글자 하나 하나도 마찬가지로 한 글자를 쓴 다음엔 전체 구도에서 그 글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보면서 다음 글자를 쓴다고 한다. 획(劃)과 자(字), 행(行)을 고려하면서 쓴다는 말이다. 낙관 하나까지도 전체적인 관계속에서 위치를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글자는 똑 같은 글자를 써도 매번 그 획의 굵기나 위치가 동일하지 않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묘한 균형과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어떤가? 바로 위에서 말한 눈대중의 문화나 메주이야기와 동일한 논리 아닌가? 요는 관계를 늘 염두에 두기 때문에 더 번거롭고 불편하고 귀찮을 수도 있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생명의 역동성과 힘을 배태해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사상과 관계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타자와 타물(他物)에 대해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행위는 가장 건강한 생명의 모습을 생성해 내는 것이다.
계량컵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사상 속에서는 이런 흐름은 약하다. 신영복선생의 붓글씨쓰기가 전체와 개체사이의 조화, 유연성과 다양성을 보여준다면, 서양의 사고방식 아래서는 전체와 분리된 개체, 획일성과 단선적 진보론이 판치는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기계론적 사고만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바퀴속에 끼여 굴러가는 개체의 초라함은 그것을 잘 나타내준다. 서양도 현대에 들어와 근대 서양사상의 문제를 느끼고 이런 부분을 해소하려고 노력해오고 있지만, 기껏해야 Feedback 이론이나 좀 더 발전된 퍼지 이론에서 만족해야 했다. 동양의 프랙탈한 역동성은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관계의 문화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을 체화할 수 없는 서양으로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반면에 해월 최시형 선생이 그의 삼경사상에서 말한 경천,경인,경물(敬天,敬人,敬物) 사상은 우주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동등하다는 우리의 생명사상을 우주원리로 설명하신 것이다. 이런 사상속에서는 관계성, 다양성 및 순환성이라는 생명사상이 발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지도 모른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야 해.”
길들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서로 바라보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그 속에서 관계가 싹트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생명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여우는 다시 한번 말한다. “너의 장미꽃이 너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서 너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야.”
배려와 보살핌의 공생정신은 보기에도 참 아름다운 것이다. 재일교포학생들의 삶을 다룬 ‘우리 학교’라는 영화에 보면 홋가이도 조선학교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 학교 교사가 된 유일한 일본인교사 후지시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는, 조고학생들이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예를 들면 집에 계시는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학교의 친구나 선생님을 위해서 열심히 뛰겠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감동을 받았고 자기 스스로도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일본인인 그에게는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또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학생을 옆에서 보살펴주고 거들어주면서 어느 듯 잘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친구 하나가 기뻤다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 말을 하는 학생의 뿌듯한 모습 속에는 이미 공생과 생명의 삶을 체득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

여기에서 공빈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공생(共生)의 삶은 공빈(共貧)을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공빈의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모색해야만 된다고 이야기했다. 공빈의 삶은 공생의 조건이기도 하면서 공생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이웃과 함께 공생하는 삶에서는 혼자 富를 누리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생이란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는 삶이니 두루 평등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 경주 최부자집 유훈에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이 내려왔다는데 바로 그런 것이다. 내가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한 내 이웃의 물질적 고통이나 결핍을 바로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 물질은 가난하겠지만 마음은 더 풍요로울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생의 정신이다.
한편 공생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자원을 독점하거나 과잉 사용해서는 안 된다. 즉 자연의 한계를 인식해야 된다는 말이다. 쓰레기가 배출되지 않도록 모든 쓰임은 순환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돌아가야 하고, 과잉생산이나 과잉소비는 자연의 원리에 어긋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공빈의 사상인데, 서양에서 생태주의(Ecology)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이란 것이 영원히 무한정한 자원을 제공해주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불편함과 결핍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불편함과 부족함이 우주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고 만물이 공생할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불편함을 즐길 수 있고 가지고 놀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자연의 한계를 넘는 과도한 욕심과 욕망은 제어되어야 한다.

제어는 그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강요하거나 금욕적인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다. 갈수록 소박한 삶 내지 무소유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고 ‘자연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깨달음을 반영한다. 이렇듯 자연의 이치 안에서 과도하게 번성하지 않는 것 또한 ‘공빈’의 주요 내용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생공빈(共生共貧)’의 사상을 노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자 도덕경 67장에는 “我有三寶 一曰慈, 二曰儉, 三曰 不敢爲天下先(아유삼보 일왈자, 이왈검, 삼왈 불감위천하선)”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중에서 자애(慈愛)가 배려와 보살핌을 의미하는 “생명의 삶”을 의미한다면, 검박(儉朴)과 불위선(不爲先)은 공빈하는 “자연의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삶에서 자연이라는 것을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소박한 자연의 삶이 이제 인류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지로 도시에서 살 것인지, 농촌에서 소농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산골에서 나무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할것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 각 개인의 처한 상황에 따라 생명의 삶, 자연의 삶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달린 것이다.

결국 생명사상과 공생공빈(共生共貧)의 철학에 동의한다면 나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인가는 회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엮어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진정 배려와 보살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어떤 삶을 택해야 할까?

진정 자연과 땅과 하늘과 함께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찍이 김지하 선생도 그의 생명사상을 논하는 많은 글들 중에서 생명과 영성, 평화의 삶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장하는 토지와 노동, 신용과 문화를 상품화하는 체제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 한바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가치들을 상품화의 고리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윤이 생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토지와 노동, 신용, 문화가 상품화 된지도 너무 오래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다.
존엄해야 할 ‘생명’도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고(생명공학과 황우석사태), 화폐의 자식인 ‘자본’까지 가장 유행하는 상품이 되어 신자유주의 사회의 주인으로 행사하고 있다(금융자본주의). 하기사 자본주의(資本主意)라는 말 자체가 자본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라는 말과 자본주의는 서로 상충하는 가치들을 이야기함에도 지금 세계는 자본주의가 일의적인 것으로 되어 민주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젠 신성해야 할 ‘교육’도 인기있는 교육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어 아이들은 고통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이른바 인적자원론과 사교육열풍). 촛불소녀는 그래서 뛰쳐 나온 것이다. ‘의료’도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일이라기보다는 돈 되는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쿠바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진료하는 모습을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민영화니 병원대형화는 그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렇듯 근대 이전시대에는 나름대로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삶의 모든 영역들이 이제는 모두 자본과 상품화의 덫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생명을 해치고 자연을 파괴하는 오늘날의 고약한 근대문명은 그런 욕망과 폭력의 열매를 먹고 자라고 강해졌다. 일찍이 간디가 근대 산업문명은 죄악이자 질병이며 인류에게 저주가 될 것이라고 갈파했듯이 근대문명은 생명의 마지막 숨구멍마저 뒤틀어 막으려고 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거듭되고 끝간 데를 알 수 없는 인간의 폭력에 대항해 자연은 이제 그간 인류가 저지른 죄과를 기후온난화와 생태재앙을 통해 되갚음하려 하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그런 자연의 역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 자본주의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인 신자유주의 체제는 오히려 근대문명의 마지막 단말마적인 비명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내가 볼 때 지금 거리에서 물결치고 있는 촛불집회의 배후에는 이런 생명파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반작용이 자리하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을 정도로 절망으로 내몰리고 있는 생명들이 본능적으로 자본과 권력의 반생명적 폭거에 저항하고 나선 것이다. 배려와 보살핌의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희구하는 생명의 저 깊은 곳에서의 본성이 잠에서 깨어나 촛불을 쳐든 것이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대중들이 촛불을 들고 행동하면서 그 해답을 찾고자 나선 것이다.
이번 광우병 사태를 단순히 ‘질 좋고 값싼’ 쇠고기를 먹지 못한 데서 오는 단순한 저항이라고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지금 촛불집회가 두 달이 되도록 지속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미 생명과 반생명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천민자본주의를 초래한 근대문명 전체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었고, 이미 생명과 생태, 평화를 희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 촛불이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생공빈(共生共貧)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평화(平和)와 생명(生命), 생태(生態)적 가치에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 촛불운동이 근대를 넘어서는 실천운동으로 되기 위해서는 근대가 지니고 있는 민족이나 계급, 민주주의의 가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밝혀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 평등이 아니고 평화인지, 국익이 아니라 생명인지, 성장이 아니라 생태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없이는 새로운 신문명과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논할 수 없다. 이것이 신문명의 길을 밝히는 시작점이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돈이면 최고이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이 지고지선의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을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다. 그런 성장지상주의 아래서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황폐화하고, 공동체의 가치가 무너져가도 성장만 된다면 상관없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번 광우병 쇠고기 사태도 결국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한미FTA를 어떻게든 체결해야 된다는 절박함에 눈이 멀어 국민의 생명과 주권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맹목으로 일관한 이명박 대통령의 생명경시 사고와 독선이 빚어낸 사건이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상관없다는 성과위주 사고방식이 졸속협상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대통령은 “내가 경제를 위해 한 일인데 국민이 양해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아직도 자기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물질만능주의를 끄집어내어 볼 철학적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핏속에 길이 흐르는 생명 사상과 호혜의 관계망이 주는 푸근함이 그에게는 깡그리 말라버렸다.
마찬가지로 수입위생조건의 자구 하나하나를 따지기 전에, 이젠 광우병과 쇠고기 자체가 말해주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점점 사람들은 육식을 즐겨하게 되었지만, 이제 소나 돼지, 닭은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사육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최소한 말 못하는 짐승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인식이 잠재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축들은 공장형 축산공장에서 상품처럼 생산되고 있고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존엄성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풀을 먹는 소에게 고기를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의 살점을 먹이게 하였으니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젠 쇠고기 문제를 하나의 통상문제나 먹을거리 문제로 다루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소나 닭은 엄연히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꽃 하나가 피어나기 위해서도 온 우주가 필요하다는 생명의 관계망과 존엄성을 인식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우리와 삶을 함께 해 온 가축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소를 생산품으로 다루고 육골분 사료를 강제적으로 먹이는 공장형 축산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소고기 1Kg을 얻기 위해서 8Kg의 곡물이 필요하고 엄청난 에너지가 투여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지구생태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쇠고기 소비를 늘려서는 안 된다. 인간은 치아의 구조로 볼 때 10~15% 비율 이상의 육식은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육식은 자제하거나 채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반생명적 축산업으로 인한 광우병이 인류에게 가르쳐주는 경고에 응답하는 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과 비슷한 류의 상황이 또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민족적 자존심과 검역주권,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적 시민의식도 이번 광우병 집회를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 중 하나이겠지만, 역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더 이상 생명이 생명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종말적 근대문명의 한계에 있다. 촛불집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들어야 할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만물과 인간을 종말로 이끄는 반생명적 근대문명에 저항하는 생명의 목소리다. 그 예민한 생명의 외침을 들을 수 있을 때 보살핌과 살림의 후천개벽 세상이 이 땅 위에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2008-06-20)

Ⅱ. 평화, 생명, 생태의 대해로

지금 운동진영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막다른 길에 들어선 듯 보인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의 역동성을 민족과 계급이라는 협애한 틀에 억지로 끼워넣다 보니 현실과 유리된 엉뚱한 운동논리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현실의 모순을 바라보아야만 그래도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대안이 생성될 수 있다. 근본적인 우리 인간사회의 문제는 폭력성과 탐욕, 반생명적 행태들에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사회의 폭력성과 탐욕이 정치적인 영역에서 발현하게 되는 것이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의 모습이다. 내셔날리즘은 종국에 가서는 제국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제국주의적 패권과 폭력성의 상징물이 바로 핵무기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 특히 힘깨나 있다고 하는 나라들은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바, 결국 이것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수도 있음은 그들은 무시하고 있다. 핵확산방지구상이 논의되고 있지만, 초제국 미국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한계는 명백하다.
둘째로 인간사회의 폭력성과 탐욕이 경제적인 영역에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가공할 모습이다. 이것은 호혜와 배려에 기초한 공동체, 그리고 공공선을 위한 나눔의 가치를 파괴한다. 인간사회의 관계성이나 다양성들을 해체시켜버림으로써 인간을 파편화, 분절화시켜서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상품화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토지, 노동, 신용 같은 것들을 상품화하여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사회를 재구성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교묘하게 ‘평등’ 심리를 조장하여 물질적 조건 향상에 인간들을 매달리게 만들고, 인간을 원자화하고 고립시켜버린다. 그 결과는 우리가 보고 있듯이 소수에게 부를 독점시키는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무한경쟁의 아비규환이다.
마지막으로 폭력성과 탐욕성이 자연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생태계의 파괴이며, 그 결과는 우리가 보고 있는 기후변화, 에너지고갈, 식량위기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절멸시킬 수 있는 제6의 멸종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반생명적 범죄행위다.
특히 최근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인간의 폭력성과 탐욕성이 정치적인 차원, 경제적인 차원, 그리고 생태적인 측면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핵을 가지겠다는 정치적 욕망, 핵산업을 둘러싼 핵 마피아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펴는 핵발전소의 안전신화와 신규건설 추진은 결국 수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고, 심지어는 10만년 이후까지의 미래세대에까지 씻을 수 없는 부담을 안기고 있다. ‘핵발전’은 그야말로 생명경시, 성장지상주의, 국가주의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이 총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폭력과 탐욕, 反생명에 근거한 근대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면적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더 이상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구시대적 기치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낼 수가 없다.
그 전환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바로 생명사상과 생태주의, 그리고 평화주의에 그 길이 있다.
제국주의적 폭력의 문제는 현시대에는 국가와 자본을 통해서 행사되는데,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다양한 지역공동체의 자치를 실현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와 자본의 틀 바깥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적 공간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구조적 폭력을 근절할 수 있고, 그러한 공간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폭력성도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혜의 관계망에 기초한 모심과 살림, 배려와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영속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상호 공존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가 관계망을 튼튼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자연과의 공생, 인간과의 공생, 미래세대와의 공생이 가능해질 것이고, 사람간의 평화, 국가와 민족간의 평화, 계급간의 평화도 비로소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는 과도한 에너지와 과학기술 중심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적정기술’과 ‘순환경제’의 원리와 틀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反생명적 에너지위기에서 자유롭고, 식량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며,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 기후변화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지역자치의 마을에서는 단선적 발전론에 기초한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완전고용’이라는 허구적 유토피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줄것이다.
이러한 자립적 공간의 예로서는 대안 공동체, 대안 학교, 대안 농촌, 대안 기업, 대안 과학 등이 있을 것인데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굳건한 그물코를 하나하나 풀어헤치게 해 줄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탐욕의 바퀴가 전진을 멈추어도 인류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함과 불편함, 느림의 가치를 수용하는 순간, 그러한 삶이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임을 깨우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 속에서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계급모순이니 하는 것들은 탐욕이라는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라는 협애한 운동론을 이제 새로운 평화, 생명, 생태의 대해 속으로 풀어놓아 주자. 계급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만 못하고, 사람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에 우선할 수 없다. 共(平和), 生(生命), 貧(生態)의 드넓은 시각 속에서 폭력과 탐욕과 反생명의 근대문명을 반성하고, 새로운 ‘超근대(Trans-Modern)’의 생명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자. 그것이 21세기 인류에게 주어진 시대의 사명이다.

(2009-11-19/ 처음 이글이 씌여진 때는 2009년이었으나 2011 후쿠시마 사고 후 그 부분을 수정해 넣었다.)
Ⅲ. 평화주의에 대하여

예전에 평화민주당이 있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이다. 민주라는 말이야 기본이지만 왜 ‘평화’였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평화는 일반적으로 전쟁상태의 반대로 읽힌다. 그렇다면 전쟁을 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요체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해외파병반대운동이나 반전운동, 반핵운동 등이 이 평화운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를 단순히 전쟁의 반대로만 이해한다면, 왠지 그 의미가 협소해지는 느낌이 든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지향성은 보이지만, 그 전쟁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더 근본적인 질문 – 왜 인간과 사회집단은 서로 싸우는지, 왜 공존하지 못하는지, 우리시대에 공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사유가 필요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법스님이 운영하는 ‘생명평화결사’라는 단체의 ‘평화’라는 의미는 그런 점에서 더 근본적인 지점까지 접근하고 있다. 김지하가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화두를 던졌을 때 그 ‘평화’는 단순히 전쟁반대를 넘어서는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내가 풀이하는 ‘평화’는 공(共)의 의미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있을 때 개인의, 마음의 평화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마존 밀림의 원시부족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벌은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개체의 평화는 일시적, 한정적일 뿐이고 사람사는 곳에서의 평화는 사회속에서 함께하는 평화일 수밖에 없다. 共은 그 함께 함이고 함께하는 共이 진정한 평화다.

하지만 共의 사회가 공동체성을 유일한 가치로 강요하는 사회는 아니다. 共의 사회는 개개인의 개체성이 최대한 발현되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이다. 개체성은 두가지 차원에서 발현된다.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고, 또 하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다.
함께 하는 共의 원리가 당연시되는 사회는 타인의 존재성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에서 소수의 일방적인 의견만 관철된다면 그 사회는 곧 폭력의 논리, 지배와 복종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것은 평화와 배치된다. 그래서 共의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획일화, 규격화, 집체화시키는 것은 共의 논리가 아니다. 획일화된 통일이 아니라 개별체의 차이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전근대사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전통농촌사회에서 두레나 품앗이 같은 것들은 이러한 공동체 속의 다양성을 발현시켜온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을의 공동작업장을 두어 여기에서 나온 소출을 마을의 공동활동을 위해 쓴다거나,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집의 농사도 두레에서 같이 협동으로 일을 해 준다든지 해서 공동체를 지키면서도 개별 개체의 다양성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결핍된 부분은 같이 해결해온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 것이다. 평화는 이렇게 다양성이 인정되는 共의 논리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두레나 품앗이의 현대적 변용이 생활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부분은 인간사회에만 한정시킬 필요도 없다. 인간사이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사이의 다양성도 상호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이 처해 있는 기반은 자연이고, 그 자연의 다양성과 관계망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된다.

共의 논리에 내재된 자유,자율성의 발현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도 구현될 수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 그 사람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최대공약수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함께 움직여야 한다. 개인과 단체간의 관계에서도 단체의 정체성에 개인을 완전히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과 집단의 정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조합이나 정당이나 시민단체나 회사,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지배와 복종, 흡수와 합병이 아닌 자율성과 자치가 인정되는 가운데 함께 하는 것이 평화이다. 인간의 폭력성도 이러한 共의 관계에서는 부정적 측면이 최소화되고 건강미와 자연스런 역동성이라는 긍정적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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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화로 풀이한 共은 동시에 ‘생명’과 ‘생태’와도 깊은 친연성(親緣性)을 가진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생명=관계맺음’이라고 말한바 있다. 共이라는 것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함께 함은 곧 너와 나, 나와 자연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만물의 관계성이 共이니, ‘생명=共’이 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이미 불교사상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듯이 핵심적으로 말하면 생명을 살리는 것, 생명 하나하나에 대해 배려하고 보살피고 모시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핵심은 살림이다. 우주만물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곧 평화를 만드는 길이다. ‘살림’의 반대가 ‘죽임’이라고 할 때 반핵운동이 평화운동의 핵심이 되는 이유도 ‘핵’이라는 것은 생명을 말살시키는 反생명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학의 ‘삼경사상’과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제우의 삼경사상은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을 말하는 것으로 예로부터의 하늘에 대한 경배, 사람에 대한 존중과 함께 만물에 대한 공경의 정신을 설파한 것으로 서구의 자연 대 인간의 대립적 사고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혁명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이런 삼경사상에 공생과 생명 존중사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천식천’ 사상은 천박한 서구식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린다는 관점을 기본으로 ‘한울이 한울을 먹이는’ 순환적 관계망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개별 차원에서는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생명의 관계망이라는 전체 차원에서는 상호공생하는 ‘共=생명’의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共은 생명인 동시에 생태적 건강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기 위해서는 상호 공존하기 위한 자세와 방식이 요구된다.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관점으로 파악하여 무차별하게 개발하게 되면 결국 공존의 토대 자체가 무너지게 되어 생명이 존립할 수 없게 된다. 평화가 침해받고 깨지는 것이다. 공존을 위해서는 적절한 제어가 필요하고, 중용의 원리에 입각한 일정한 결핍과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강제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지구생태계의 존재방식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의 욕망이 적절하게 제어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럴 때만이 생태계가 평화로운 생명의 관계망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하는 共은 생태적 안정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共이 곧 생태의 문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각해보면 생명의 관계망은 다양한 개체가 상호 순환하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의 순환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바로 생태적 건강성 유지가 모두 함께 하는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할 때 共이 가능하고, 생명이 共의 관계에서 순환될 때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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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共으로 보는 파악하는 관점과는 별도로, 평화라는 주제를 민족통일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는 흐름이 또 한편으로 존재한다. 우리 사회에서 평화운동의 목적은 외세를 몰아내고 분단된 통일조국의 완성을 기하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물론 옳은 이야기다. 우리 근세사가 일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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