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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가톨릭 환경운동, 이대로 둘 것인가?/정홍규 신부

관리자 0 1,690 2016.07.26 13:54
[특별기고] 가톨릭 환경운동, 이대로 둘 것인가?/정홍규 신부

발행일 : 1996-06-09 [제2006호, 12면]
이제 환경운동은 쓰레기 종량제로 끝나버린 듯하다. 사실 종량제로 쓰레기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쓰레기 문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적대로 인간 영성의 문제 즉 금욕과 절제와 희생정신이 일상생활에 뚜렷이 파고 들어가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모든 것이 자본을 동원한 광고와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산업사회의 체제가 있는 한 정부의 환경정책은 하나마나이다.

그리고 역설적인 것은 지금의 환경문제가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로 발생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국민 너나할 것 없이 원전도 더 짓고, 공단도 더 짓고, 자동차도 더 만들자는 경제우선의 논리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돈을 빨리 벌어서, 경제를 살려서 환경에 투자할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식이다. 국민들은 2000년의 생태적 조건은 아예 무시하고 월드컵이 무슨 기적을 줄 것처럼 야단들이다. 2000년대에는 물 문제, 공기 문제, 식량 문제, 원자력 발전소 문제가 더욱 심각할 것이 뻔 한데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동네 프로야구보다도 뒷전이다.

이것도 우리의 현실이지만 교회안의 환경운동도 유행처럼 지나가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방향에 따라, 각 개인의 도덕적인 의지에 따라, 사회운동의 흐름에 따라 혹은 건강에 좋다는 무공해 농산물을 먹는 정도에 따라 환경운동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오히려 암웨이세제나 납작한 도시락 세제의 파동을 보면 교회안에 환경의식도 알만한 수준이고 거의 원시적인 인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

환경문제는 21세기의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은 제기할 것이다. 거의 2000년 동안 교회를 이끌어 온 구원신학의 틀이 변화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직면한 선교 및 사목 신학적 모형을 교체하기 위한 작업과 성찰이 대희년을 앞두고 요청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위기와 변화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한편으로는 시대적 표징에 응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복음과 성사의 내용을 전승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 모형을 찾아내는 과제로써 대희년이 다가온다.

현재 본당에서 실천하고 있는 환경운동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이 운동도 본질적인 영성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나가야 할 시점에 왔다. 욕망의 축소로써 자발적 가난의 영성, 시멘트에서부터 황토의 영성, 축소지향의 본당 건축, 귀농운동으로써의 농민사목, 도농연대의 생활공동체운동, 영성과 생활의 결합으로써의 물자개발, 토착민 영성, 공소의 보존, 생태 여성운동, 자급자족의 생명 경제, 교회사업체의 해체, 수도원 재건, 교회노동의 쇄신 등 영적인 상상력, 새로운 교회상의 재편이 요구된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정의와 평화를 강조해 왔다. 교구마다 정의평화 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 이제 창조보전 즉 지구정의의 문제도 첨가하자. 창조물과의 평화없이 참된 정의를 살릴 수 없다. 공해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논의 즉 포럼이 필요하다. 한반도 창조 문제를 다룰 환경공의회, 동북아시아의 지구 정의 문제를 다룰 환경포럼 등 다양한 각도의 원탁회의를 통하여 신학적 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1983년의 밴쿠버의 세계 교회회의, 1989년 바젤회의, 1990년의 서울 세계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개신교 회의이지만 우리 가톨릭도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이라는 주제로 한반도 전체회의를 연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환경에 대한 공동선언문을 작성하여 상호 참여 결의서를 교회에 권유하는 것이다. 환경과 창조에 대한 관심은 어떠한 유행이나 사회운동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이 문제를 중시해야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정홍규 신부ㆍ우리농촌살리기 대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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